1998. 12. 15
A Midsummer Night's Dream
"누구세요…."
"저녁에 잠깐 보자고 했었잖아. 조금 전에도 걸었는데 안 받길래."
"……───?"
"그래. 바쁘면 무리하지 마."
"지금…나갈게. ……어디로 가면 돼?"
그러나 카페 영업이 끝날 때가 되어서야 나는 약속 상대와 만나볼 수 있었다. 그는 레인코트를 입고, 물비린내를 몸에 두르고, 소리 내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창백한 입술을 몇 번 열었다 다물었다. 이어서 굉장히 유감스럽다는 투로 뱉는다. "늦어서 미안해, 길을 잃어버렸어."
"사거리 쪽에, 전엔 없던 건물이 있어서 헷갈렸어…."
"오 년 전에 생긴 레코드점 말하는 거 아니지?"
"……미안."
"일단 별일 없었던 거니까 됐는데……."
"……."
"시릴, 괜찮아?"
"응, 괜찮아."
"비 맞은 거야?"
"아무것도……. 생일이라면서?"
"오늘 처음 알았다는 것처럼 말하네. 선물 가져갈 테니까 만나자고 한 건 너면서…이상하다."
"아니야……예전부터 알고 있었는걸. 생일 축하해. 선물을 준비했었는데…그런데, 잃어버렸어. 정말 미안해."
1999. 01. 23
Groundhog Day
근 한 달간 눈이 멈추지 않더니, 이젠 얼어붙은 대지를 전부 녹이겠다는 기세로 비가 내렸다. 서리 낀 창문을 타고, 엔딩 크레딧 OST가 흘러내린다.
"20세기의 마지막 해를 살아가는 기분이 어때?"
"특별할 것 없지." 내가 대답한다.
"영화는?"
"…나라면 그냥 미쳤을 것 같아."
다시 질문하는 대신 그는 소리 내서 웃는다. "아, 정말 인상 깊은 대사였어……신이긴 한데, 하나님은 아니야.(1) 전부 고전이라는 걸 인식할 때마다 오싹해서 혀를 깨물 것 같아."
"안 마시고 그렇게 취하는 비결이 뭔지 알려줘 봐…."
고전이라고? 고작 육 년 전의 영화인데. 상대는 웃고, 웃다가, 차라리 슬프기라도 하다는 듯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잠잠해진다.
나는 그의 왼쪽 손, 새끼손가락에서 푸른 보석이 빛나는 모습을 본다.
"어떤 것 같아?" 그는 내 눈앞에서 반지를 낀 손을 흔들어 보이고, 어두운 실내에서 그 빛이 떨어지는 별의 조각처럼 반짝이지만, 특별한 감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회상하자면, 오래 바라볼수록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지는 매력이 그 보석엔 있었던 것이다.
나는 플레이어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꺼낸다. 화면이 완전히 암전된다.
그는 이쪽을 바라보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허락을 구한다. "다시 보러 와도 돼?"
"영화를?"
"연극도 괜찮고……."
"연극은 '보러 가는' 거겠지."
1999. 02. 06
As You Like It
"오늘 오전 4시 30분쯤 템스강 근처에서 변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남성으로 추정되는 시신은 적어도 두 달 이상 부패가 진행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경찰은 주변 지역의 실종신고 현황 등을 파악하여 남성의 신원을 찾고, 부검을 의뢰하여 정확한 사망 경위를 파악 중입니다……."
화창한 토요일 오후. 누구도 레스토랑 구석의 TV가 지껄이는 끔찍한 뉴스 따위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점장님, 손님이 다 도망가겠어요. 『명탐정 푸아로』나 좀 틀어봐요!" 서빙을 하던 점원이 리모컨을 찾아 채널을 돌린다……아이들은 공원 분수대에서 떠들고, 새들은 오랜만에 구름 없는 하늘을 구경하기 위해 높이 날아간다. 탑 시계가 열두 번 울린다.
가장 마지막 종과 동시에,
"저 소리가 그리웠어."(2)
"……늘 듣잖아?"
"그렇긴 해."
"그만둔다는 거 정말이야? 어렵게 들어갔으면서."
"───,"
"왜."
"……너, 도 지금 직업에 너무 안주하지 않는 편이 좋아. 시대는 빠르게 변하거든."
"난 가끔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전혀 모르겠더라……나는 괜찮아, 잘하고 있어."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장갑 위에 착용한 반지를 천천히 돌리기 시작한다.
"사실 중요한 물건인 거지?"
"그래, 유품이야."
"…거짓말."
"거짓말이지만, 이걸 보고 있으면 비슷한 마음이 들어."
"어떤 사람이었는데?"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었어. ……전부 나 때문이야."
"나는 살아남았으니까."
그는 웃으며 고백했다.
1999. 03. 07
2001: A Space Odyssey
스탠리 큐브릭의 기일.
"신에게 편지를 받는다면 어떨 것 같아?"
"종교를 믿기로 한 거야?"
"아니야……그런데 만약 그 편지에서, 황금향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어떨 것 같아? 가 보고 싶어져? 진지하게 대답해."
"진지하게, 요즘 무슨 약을 하는지를 질문할게."
"좋아. 우선 에든버러 외곽의 어느 창고에서 LSD를 싸게 거래해 주는 곳이 있는데……."
"제발……."
"거짓말이야, ───……하지만, 지구 바깥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을 것 아냐. 이 별은 새장이 아니야. 무엇도 우릴,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미지의 공포로부터 지켜주지 못해. 가시적으로는, 네 주변 사람들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타인을 상처입히지. 절대자가 있다면 그건 사람의 호명에 불과하지만, 두려움이야말로 신의 본질이니까. 그런 것들이 완전히 제거되고 '제어된' 장소를, 바로 그 경외의 존재가 제시한다면…."
"학생 때, 네가 그 강의를 더 듣지 못 하도록 말렸어야 했어……그래, 이제 인류가 발견하지 못한 대륙은 없지. 가능성을 듣는다면 이끌릴 거야. 궤도에서 벗어나고 나면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개념에 집착하지 않게 될지도 몰라. 살기 위해서라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유리 돔에 칩거하는 행위도 가끔 필요할지 모른다고…하지만 넌, 그냥 내부의 문제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뿐이잖아. 멸균실은 네 상상 속의 성역인 거잖아."
"내가?"
"그래, 네가……."
"내가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 속으로 도망치고 싶어 한다고?"
"뭐가 그렇게 웃겨?"
"아아……하, 하하. 글쎄.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고아하고 위태로운 신념에 질식할 것 같아…."
1999. 04. 24
Edward Scissorhands
새로 개장한 레스토랑 이 층에는 테이블마다 보드게임이 비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예약 손님들이 우선되는 동안 체스를 플레이했다. 한 번도 이길 수 없었다. 시릴이 무언가에 이기려고 드는 건 처음 봤기에, 나는 패배감보다 기묘한 의심에 사로잡혔다. 내겐 타인이지만 그에겐 중요했을 누군가의 죽음, 유품, 모든 일을 그만두고 영화나 연극에 빠져들기 시작한 사람…퍼즐 조각들이 맞춰질 듯하다가 흩어져버린다. "예전에는," 문장을 마무리하기 전 종업원이 도착해,킬트 풍의 테이블보 위 그럴듯한 저녁 식사를 늘어놓는다.
"예전보다는 자주 만나잖아." 그는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뭐…그렇지."
"예전 관계가 좋았어?"
"싫다고는 생각한 적 없어."
"분명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거야. 사실 아니었다면, 나도 찾아오지 않았을 테고…."
상대는 물이 담긴 컵을 잡고 와인잔을 다루듯, 쏟아지지 않을 정도로 흔든다.
나는 잔잔하던 표면이 거품으로 혼탁해지는 광경을 바라본다. 바로 그것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1999. 05. 29
Back to the Future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기차가 물을 머금은 선로 위 미끄러진다.
꽉 잠긴 창문 너머서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울린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진리를 찾기 위해 '신을 쫓는 기계'를 만들었지. '신의 입자'가 발견되고, 표준 모형을 구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은 채워졌어. 인류가 137억 년 전 무(無)의 파동, 허수의 시간에서 태어난 세계를 재현하는 동안, 넌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한 번이라도 고민해 본 적 있어?"(*3)
"산다는 건 거짓말이야.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는지 모르는 채 불안감에 '살아 있다'는 말을 믿고, 믿는 척을 하는 거야. 타인의 호의를 짓밟는 악인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습관적으로 고맙고 좋다고 말할 뿐이지, 진실로 행복하며 행복해지고 싶다곤 바라지 않아. 마치 배역이 배우를 알 필요 없다는 듯, 아니. 반대인가? 관객은 배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연기하는지 알 수 없다는 듯…."
나는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댄 채 그의 말을 잠자코 듣다가, 꿈속에 빠져들기 전 한 마디만을 뱉었다.
"……너 많이 달라졌네."
"덕분에?"
1999. 06. 12
A Clockwork Orange
"갖고 싶은 책 있으면 가져가도 괜찮아."
"여기서 일하는 줄 몰랐어."
"계속 노는 줄 알았어?"
"네 인생이니까…."
"난 여길 좋아했었는데." 그는 영화 잡지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밝은 주황으로 칠해진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문제작', '스탠리 큐브릭', '대항 문화'……정리 겸 모든 품목을 반값으로 판매하겠다는 파격적 선전을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점을 찾는 손님은 없었다.
"종소리 때문에?"
"모파상은 매일 아침 에펠탑 2층 레스토랑에서 식사했지. 탑이 눈에 띄지 않는 곳은 파리에서 그곳뿐이라고."
"아예 떠날 생각은 못 했던 걸까."
시계탑 로비는 한적했다. 유월의 희미하고 부드러운 햇빛만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유리와 거울 사이를 거닐며 책 표지에 인쇄된 그림들을 좀먹었다. 마치 우리 외의 사람들은 이곳이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모르는 것 같았다.
"저 작은 문은 뭐야?"
"예전엔 시계점이었대." 그는 낡은 나무문 앞까지 다가서 녹이 슨 청동 손잡이를 돌린다. 판자에 칠한 초록색 페인트가 이끼처럼 날렸다. 공방처럼 꾸며진 내부는 비좁고, 볕이 들지 않아 눅눅했다. 방 구석에 흩어진 낡아빠진 책에선 따끔거리는 먼지 향기가 나고, 벽걸이 시계, 괘종시계, 손목에 차는 투박한 디자인부터 영롱하게 빛나는 금빛 사슬에 매달린 기계 장치들은 제멋대로 째깍거리며 이쪽을 응시했다. 일정한 리듬이 엇나가며 겹친 음색은 마치 사람의 눈이 깜빡이는 소리 같아서, 나는 구경거리가 된 기분에 빠지고 말았다.
"극단에 들어가게 됐어."
"뭐?"
"어제 오디션에 합격했거든."
"네 인생……이지? 안 말린다."
1999. 07. 24
Ensaio sobre a cegueira(*4)
버스에 올라, 밀레니엄 브릿지 근처를 지날 때였다. 라디오 진행자가 밝은 목소리로 읊는다. 내년 3월이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대관람차에 올라 런던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게 되며 템스강을 가로지르는 대교 역시 유명한 관광지를 이어줄 것이다. 많은 것이 바뀔 것이며 무엇 하나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당장 차창 너머로 그들이 말한 모든 건축물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나는 못 탈지도 모르겠네…."
"그거 무언가의 불길한 암시야, 아니면 고소공포증에 대한 한탄이야?"
"12월 31일에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잖아?"
"네가 그런 걸 믿을 리 없잖아?"
"안 믿어. …아마도?"
"새 일은 어때?"
"올해 마지막에 하나 올리기로 했으니까…보러 와. 고전이야."
"상상이 안 가."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실제로 모든 것을 연기하기 이전까지는."
1999. 08. 09
Titus Andronicus
"시계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냥 고르는 걸 도와주면 돼. 뭐든 괜찮아."
나는 얇은 금속 줄이 달린 모델을 골랐다. 시릴은 자신의 카드로 포장 주문을 결제했다. 점원은 벨벳 원단이 붙은 상자를 흰 리본으로 묶으면서, 120m까지 방수가 되는 품목이라 설명했지만 어느 누가 물에 빠지면서 그런 걸 신경쓴단 말인가?
그는 한참이나 왼쪽 손목을 바라보다가, 고양된 듯 중얼거렸다.
"고마워."
"내가 산 것도 아닌데?"
"그래도……."
"뉴스 읽었어?…신원을 못 찾은 시체가 공동묘지에 묻힌대."
나는 기쁜 투의 목소리에서 문장의 음울함을 잡는 것에 다소 어려움을 느꼈다. "삼 월쯤 났던 기사?"
"응."
"잊어버리고 있었어."
"그럴 만도 해. 고마워, ───…."
시계를 감싸던 종이 옆엔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연극 티켓이 놓였다. (*5)
"너무 영향받는 거 아냐?"
"아니. 손이 잘리고 혀가 뽑히고, 한쪽 손을 잃고, 목이 떨어지고 이성을 놓은 채 바닥을 기다가 죽어서, 시체는 고기 파이로 만들어진다 해도……나는,"
"시릴,"
"이 세계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거야. 공포에 질려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마음 깊이 감사하고 있어. 결국 '나'라고 생각해주어서."
1999. 09. 12
El gran teatro del mundo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은 연극일 뿐입니다."
"모든 이가 용서받기를."(*6)
극본의 마지막 대사와 함께 모든 빛이 발한다. 내용적 특성 때문인지, 커튼콜은 열리지 않는다. 나는 무심코 옆에 앉은 이를 돌아보다가,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흘리는 얼굴과 마주친다. 그 슬픔을 축하하듯, 막이 완전히 내리면 수천 번의 손뼉 치는 소리가…….
"놀랐어…장례식에라도 온 것처럼."
"틀린 비유는 아니네…." 그리고는 드라이브 내내 침묵하더니 내릴 때가 되어서야, 그가 인사 대신 중얼거린 말을 아직 기억한다. "용서 따위 구할 것 같아?"
1999. 10. 03
Knockin' On Heaven's Door
"이번 생일에는 안 잊어버릴게."
"뭘? 아, 작년 일 말이야? 신경 안 썼는데."
"기대해."
"솔직히 네가 그렇게 말하면 불안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건 같으니까 괜찮지? 기대도 불안도……."
"사실 별다를 것 없다는 걸 알긴 하지. 다른 날처럼."
"그래도 태어난 날의 상징이 불멸이라니 아름답잖아. 언제나 네 이야기가 부러워."
1999. 11. 31
The Matrix
"자신이 없는 세계를 설계하는 것이 극의 시초일지 모른다. 자신이 없는, 자신이 돌아갈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것."
"연극에 참여하게 되었으니까, 보러 와 주면 좋겠어."
1999. 12. 15
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
"이 사건의 말 없는 관객들이여. 내게 시간이 남아 있다면…."
CONTINUE
1. "I am A god, not The God."─영화 『사랑의 블랙홀』 대사. 루프물의 클래식.
2. 빅 벤은 2017년 8월 27일 자정부터 2021년까지 보수 공사로 인해 종을 울리지 않았다.
3. 힉스 입자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2013년 LHC(대형 강입자 충돌기)의 가속 실험을 통해서였고, LHC가 처음 가동된 것은 2008년 9월 10일.
4. 소설·2008년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5.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셰익스피어의 초기 작품이자 첫 번째 비극. 잔혹한 복수극이다.
6. 칼데론의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 마지막 대사. 극중극을 표현한 대표적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