意識=認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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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카포/D.C.

Novel

2024. 11. 15.

S#1 아침, 침실
상처가 아물었다. 반창고도 약을 바른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아에라스는 잠옷 소매를 걷은 채로, 아드리아나가 손수 붕대를 감고 표피를 어루만지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때로는 뼛속까지 침투해 뇌를 헤집고 그것이 정말 분홍빛이고 부드러운지 확인하는 손길.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캐노피 침대의 기둥을 타고 내려온 스킨답서스가 축 늘어진 팔을 간지럽힌다. 인조 식물에서는 플라스틱 냄새가 난다. 제집처럼 익숙한 향을 그는 들이마신다. 동시에 케이크의 달콤한 향기.
찰칵.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의 버튼을 누른다. 노이즈가 4초가량 진동하더니 익숙한 음성으로 변한다.
─ '기억.'
─'기억'이란 잠에 들게 하는 약을 뜻한다.
─'소풍'
─'소풍'이란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은 땅이다. 유의어로 '악지(惡地)'가 있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일 것이다. 어제는 초콜릿 오렌지였으니까. 
─'케이크'
─'케이크'란 절대적인 순환의 규칙이다.
눈부신 조명에 둘러싸여 아에라스는 미소 짓는다. 침실에는 전등이 없다. 다음 날은 레몬 머랭 타르트. 구역질이 날 것만 같다. 그는 주방으로 향한다. 스물셋. 아니 스물두번의 걸음이면 충분하다. 테이프의 음성이 줄곧 이야기한다. 어디에서? 모든 곳에서.


S#2 아침, 부엌
창을 활짝 열어젖혀 햇빛이 쏟아진다.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식탁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는다. 좋은 아침. 그가 말한다. 
좋은 아침, 아에라스.
샹들리에가 추락한다. 프리즘을 머금고 반짝이던 보석이 조각나 쟁반과 테이블보에 흩뿌려진다. 뜨거운 촛농을 뒤집어쓴 것처럼 아드리아나의 얼굴이 녹아내린다. 케이크 크림과 함께. 그녀가 도자기 주전자를 기울여 홍차를 따른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엉망이 된 표정으로 이쪽을 보며 웃고
─ '샹들리에'
─ '샹들리에'는 태양계의 중심이 되는 항성이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자전 주기는 약 25일이며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중심핵, 그 바깥쪽에 있는 복사층과 대류층, 그리고 빛을 직접 바깥으로 방출하는 광구ㆍ채층ㆍ코로나를 포함하는 대기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아에라스는 아침 식사로 케이크를 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에라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아침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음 주가 네 생일이잖아.
무언가를 입에 욱여넣고 삼키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았다.
갖고 싶은 게 있어? 하고 싶은 일이라거나.
좋아하는 맛이, 요리의 무의식적인 습관이, 양 조절이, 모두 생경할 뿐이고, 게다가 이 육체로는
물론, 파티를 준비할 거야. 
좋아하지 않았다.
─ '생일'
─ '생일'은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을 뜻한다. [2]
좋아. 아에라스가 대답했다. 아드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선물은? 그녀는 웃지 않는다.
무엇이든…….
상대가 초조해하는 표정을 마음껏 관찰하다가, 아에라스가 말을 잇는다. 나를 놀라게 해 봐, 아드리아나.
─ '선물'
─ '선물'은 '사이안화칼륨'을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3]
설탕을 듬뿍 넣은 홍차와 딸기잼 향기가 섞여 두통을 유발한다.
기대해. 아드리아나가 케이크를 조각내며 선언한다. 생크림, 딸기 과육, 시럽 사이에 정답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케이크를 해체한다. 삼키고, 무너트리고, 짓뭉갠 다음, 
테이프의 노이즈.
식기 부딪히는 소리. 아우성.


S#3 아침, 중정(中庭)
작은 밭을 돌보는 아에라스. 땀을 흘리고 흙을 만지며, 무아 상태에 빠져든다. 붉은 흙 위로 뻗은 새하얀 손을 낫으로 벤다. 갈대로 짠 바구니에 조심스레 담는다. 작업은 한 시간 정도 계속된다.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천장을 올려다본다. 눈이 내린다. 여름의 새파란 하늘, 적란운을 찢어 떨어트리듯이 슈가 파우더에 뒤덮이는 제누아즈.
짓물린 딸기의 과육이 손톱 끝에 파고들면 시큰거리는 통증이 느껴진다. 


S#4 아침, 서재
책을 정리하는 아드리아나. 느린 보폭으로 책장 사이를 거닐며 선반의 먼지를 닦아내고 오랫동안 펼쳐보지 않았던 책들을 벽난로 속에 던져넣는다. 장작이 딱딱거리며 타들어 가고 불꽃이 그녀의 손을 감싼다. 
문이 열린다. 한쪽 손에 트레이를 든 아에라스. 두 눈이 마주친다. 머그컵에 담긴 커피 두 개. 다시 플레이어가 울린다.
─ '바다'
─ '바다'는 무색무취의 투명한 기체를 뜻한다. 질소(78%), 산소(21%), 아르곤(0.9%), 이산화탄소(0.03%)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외 0~4%의 수증기가 동시에 존재한다. 수증기를 제거한 건조 바다는 약 28.97g의 평균 분자량을 유지한다. [4]
─ 예문: "사람은 바다가 없으면 호흡할 수 없다."
한 발짝, 다시 한 발짝. 이곳에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기척을 숨기고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아드리아나에게 다가간다.
─ '커피'
─ '커피'는 쓴맛이 나는 짙은 갈색의 꿈이다. 수면을 돕고, 악몽을 내쫓는 기능이 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포옹한다. 살결이 밀착하고 체온이 옮겨붙는다. 아드리아나의 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갑다……꿈결의 잔해가 그들의 발치 아래 나뒹군다. 아에라스는 피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낀다. 창문 너머 샹들리에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오기 전에 그녀가 항성을 한 입 베어 물었기에. 이렇게 따스하고, 또…….
아에라스.
…….
아에라스, 괜찮아?
그는 말없이 아드리아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귓가에 대고 다정히 속삭인다.
배신자.


S#5 아침, 거실
─ '13월의 창백한 주문'
─ '지지 않는 달'
─ '잠들지 않는 꿈 세계'
두 사람은 이제 어깨를 맞대고 소파에 앉아 있다. 50년 전의 느와르 영화가 TV에서 흘러나온다. 깜빡이는 취광이 그들을 감싼다.
─ "둘 중 아무도 포기해선 안 돼요. 우린 같은 배를 탔으니까.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생사를 함께 해야 돼요. 기억하나요?"
─ 물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키즈, 당신이 내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듯이요. 그 전차 얘기 말이에요. 모든 게 끝날 때까지 내리지 못한다는 것도요. 무덤이 있는 그곳 말이죠. [5]
백야는 곧 끝날 거야. 아에라스가 중얼거린다. 아드리아나는 대답하지 않고 책장을 넘긴다. 생일 축하 노래들이 담긴 동화책이다.
언제? 그녀는 가사 없는 곡조를 부르기 시작한다, 나지막하게
초를 불어 껐을 때.
맹세할 수 있어?
어렵겠는걸.
알아. 페이지를 한 장 찢어내고 책을 덮는다.
여러 가지 망가진 것 같네. 이번에도.
─ '의식'
─ '돌아가는 케이크'
─ '원형에 대한 희구'
커피를 복용하지 않았으니까.
떠올려내 봤자, 좋은 일 따위 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망각은 축복이야.
나는 아드리아나를 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기대는 하고 있으면서?……너를 놀라게 할 방법 따위. 그런 건, 모른다. 돌연 아드리아나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기대밖에 할 수 없어. 나를 그렇게 만든 건 너고.
천천히, 확실하게, 그녀의 얼굴에 만족감이 차오른다. 하지만 포화 상태가 되었을 때, 그것은 방향을 잃고 기울어진다.


S#6 아침, 침실
커다란 새장 속에서 기계들이 노래한다. 날개는 고서의 장으로 이루어졌고, 관절은 금속이다. 아에라스가 하나를 붙잡는다. 내부에는 전지도 충전 단자도 없다. 먼지와 모래 몇 알이 굴러다닐 뿐. 그랜드 피아노 아래 드러누워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른다. 기계 새를 대신하여.


S#7 아침, 해안가 절벽
폭풍우가 몰아친다. 아드리아나는 팔을 힘껏 휘둘러 파도 속에 열쇠를 던져넣는다. 결심, 결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저지른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돌아선다. 물결이 아쉬운 듯, 포악하고 탐욕스럽게 그녀의 맹점에서 일렁인다.
아드리아나는 돌아가기로 한다. 서둘러야 했다. 새까만 하늘을 등지고 그녀는 달린다. 집에는 아직 서른여덟 개의 열쇠가 남아있었으므로. 


S#8 아침, 창고
철제 선반과 낡은 상자를 뒤적이는 아에라스. 로프를 목에 대 본다. 익숙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녹슨 칼을 손목에 대고 그어본다. 피가 흐른다. 소매가 젖는 감각이 낯설지 않다. 꼭대기 층으로 단숨에 뛰어 올라가 창문 난간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어 본다. 현기증이 일었다. 떨어지는 데 2초도 걸리지 않겠지. 직감이다, 경험에 의한.


S#9 아침, 부엌
리넨에 장미 자수를 새기던 아드리아나. 바늘에 손이 찔린다. 카세트테이프 소리에 정신이 팔린 탓이다. 아니,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 '바다'
─ '바다'는 무색무취의 투명한 기체를 뜻한다. 
언제 테이프를 녹음했더라?
─ 예문: "사람은 바다가 없으면 호흡할 수 없다."
애초에, 저것은 나의 목소리인가?
─ 질소(78%), 산소(21%), 아르곤(0.9%), 이산화탄소(0.03%)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외 0~4%의 수증기가 동시에 존재한다. 수증기를 제거한 건조 바다는 약 28.97g의 평균 분자량을 유지한다. [4]
혈액이 번지는 동안, 그녀는 뭉툭한 불쾌감에 대해 고민한다. 아프다. 그 단어를 떠올려내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소모된다.


S#10 ???
카세트테이프의 음성.
〈생일 축하 노래〉
Happy birthday to you
해석: 새로운 피를 받아들이고, 심장이 뛰기 시작할 거야
Happy birthday to you
해석: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이하자. 행복한 삶을 보내기 위해서.
Happy birthday dear […….]
해석: 영원히, 잊을 수 있다는 건 행복이야
Happy birthday to you
해석: 언젠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S#11 아침, 부엌
판 초콜릿을 중탕하는 아드리아나. 문득 의문이 든다. 뜨거운 물에 직접 담그지 않아도 괜찮았던가? 망설이는 사이 초콜릿이 쏟아져 물과 뒤섞인다. 냄비를 가스버너에서 내릴 때, 손가락에 액체가 튄다. 희미한 단맛을 예상하며 그녀는 손을 핥는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S#12 아침, 부엌
레몬 머랭 타르트. 바스크 치즈케이크. 아에라스의 생일까지 이틀 남았다. 블랙 포레스트. 애플파이. 마지막으로 딸기 생크림. 침범되지 않는 절대성. 오늘은 바스크 치즈케이크.
아에라스는 생연어를 토막 내고 가시를 발라낸다. 핏물이 나이프에 끈적하게 묻어난다.
너무 달지 않아? 아드리아나가 걱정스럽게 질문한다. 
적당해.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지느러미를 삼킨다.


S#13 아침, 식료품점
우유 판매대에서 고민하는 아드리아나. 그녀는 마법으로 시체를 빚어내는 과정과 계량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가게 문을 열고 나올 때 낙엽을 밟는다. 아, 벌써 가을인가. 단풍잎을 책갈피로 만들기에는 늦어버렸다. 돌연, 누군가 그녀를 붙잡는다.
"계산을 잊으셨어요, 손님." 캐셔는 곤혹스러움을 숨기며 말한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통과한 바람이 그녀의 뺨에 스친다.


S#14 아침, ???
카세트테이프의 음성.
〈딸기 생크림 케이크 레시피〉
제누아즈 재료
─ 달걀 3개
─ 설탕 90g
─ 박력분 90g
─ 버터 25g
케이크 장식 재료
─ 생크림 200ml
─ 우유 20ml
─ 설탕 30g
─ 딸기 스무 개
주문
─ 믿음(확신)
─ 시체 한 구
─ 썩지 않은 심장


S#15 아침, 부엌
생일.
식탁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반쯤 벗겨진 테이블보를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고정하고 있다. 한때 테이프를 보관하던 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도 함께.
생일 축하해. 아에라스가 이야기한다.
하지만 오늘은 네 생일이잖아.
네 생일이기도 하지. 기억 안 나?
잘 모르겠어.
─ '기억.'
─'기억'이란 잠에 들게 하는 약을 뜻한다.
아에라스가 손을 뻗는다. 전원 버튼을 누른다. 폭죽에 들어 있던, 반짝이는 종이조각이 허공에 날린다. 팔랑팔랑, 바닥에 완전히 착지하기 직전 완전한 정적이 찾아온다. 그는 테이프를 뒤집는다.
B면에는 아무것도 녹음하지 않았을 텐데, 아드리아나가 생각한다. 막연한 불안이 닥친다. 그러나 아에라스는 멈추지 않고. 그는 달의 뒷면을 재생한다. 
─ 당신의 생일은 언제입니까?
─ 당신의 부모님은 상냥한 편이었습니까?
─ 처음으로 사귄 친구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계절이 바뀌는 형태를 묘사할 수 있습니까?
─ 로마 숫자를 100까지 쓸 수 있습니까?
차분하고, 근육을 뼈에서 도려내는 것처럼 냉정하고,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사물화하는 목소리. 아에라스의 목소리. 아드리아나가 소리친다. 그만둬. 비명이라기보다 얕은 호흡에 가깝다.
─ 2, 3, 5, 7, 15 중 소수가 아닌 수는 무엇입니까?
─ 처음으로 영화관에 혼자 간 날은 언제였습니까? 무슨 영화를 보았습니까?
상자가 열리고 많은 것이 쏟아져 내리고 빠져나가지만 그 현상마저 과거에 불과하다. 그녀는 휘청거리다가, 아에라스의 팔을 붙잡는다. 품에 안겨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 타인에 대해 얼마나 떠올려낼 수 있습니까?
시야가 점멸한다.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있는 것인지, 테이프의 유언을 듣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 당신은 아직 '얼마나' 남아있습니까?
아드리아나는, 언젠가 아무도 없는 홀에서 라디오 프로그램 하나가 끝날 때까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춤을 추다 마루에 드러누웠던 일에 대해 떠올려낸다. 두 사람은 얼굴 근육이 아플 정도로 입꼬리를 올리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고, 입안에 단맛이 맴돌고,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저주가 끝나면 그녀는 물러선다. 나이프를 손에 쥔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질문뿐이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그 사람은……누군가는……떨리는 두 손으로 과도를 붙들고 날을 겨눌 방향을 찾으려 필사적이다, 칼날은 아에라스의 손에 저지된다.
그는 손이 베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이프를 빼앗아 바닥에 던져버린다. 그가 다음 문장을 발음한다, 명확하게 무기질적으로: 죽고 싶어졌어?
누군가 대답한다: 아직은 아니야.
"그렇다면." 아에라스는,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의 되감기 버튼을 누른다. 차르륵,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숨 막히는 공백을 메운다. 혈흔으로 얼룩진 손이 상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처음으로 돌아가."

D.C.


아드리아나는 아에라스를 되살려내고 기억을 지우고 가두기를 반복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자신의 기억을 소모하고 있다(아에라스가 처음으로 죽기 직전에 건 저주).

[1],[2],[3] 표준국어대사전
[4] 한국대기환경학회, 대기환경용어사전 
[5] 이중 배상(1944)


2024-11-13 커미션
참고 작품 - 송곳니(2009)

意識=認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