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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열차의 객실이었다.
소년이 눈을 뜬다. 그는 흰 헤드 드레스를 착용한 소녀와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소년은 그녀를 자신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녀가 세상만사에 달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창밖 풍경 따위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것도 구태여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조차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미약한 엔진음과,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이 두 사람을 쉴 새 없이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다. 자신의 힘으로 날아가는 것만 같다. 사실은 좌석에 앉아 있을 뿐인데도.
열차가 터널에 들어서자, 조명 없는 작은 방은 암흑에 휩싸인다. 철륜이 레일에 스치며 덜컹거리는 소리, 멈춰 있던 공기가 갈라지는 파열음만이 캄캄한 세계에 남는다. 그러나 호흡은 들려오지 않는다. 흑색 공간은 한참이나 이어진다. 소년은 빛을 부르는 주문을 외우듯 말한다.
나를 데려가 줘. 네게 무엇이든 줄게.
그러면……. 소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 줄 테야?
한 점의 광원으로 축소된 출구가 그들을 덮쳤다.
1
마법이 시작되어도, 혹은 풀려버려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승강계단을 밟던 인공 관절이 아려 오다가도, 전부 기억의 바다에 내던져진 파편을 매만지는 행위 같기도 하다. 과거는 희미하고, 현재만이 선명하지만, 그마저도 선로 뒷편으로 사라져 버린다. 경관은 초속으로 변화하지만 그것이 스크린에 반영되는 녹화된 영상인지, 유리 건너편을 직시하는 실제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달라지는 것은 창문이다. 수많은 계절이 비친다. 설국에서 호수 한복판으로, 단풍나무로 이루어진 굴길로. 만개한 화원으로. 말라비틀어진 공동묘지로. 별바다에서 다시 어둠으로……. 사탕 가게에 진열된 유리병을 하나씩 열고 맛보듯이, 소년은 그 풍경들을 차곡차곡 눈에 담다가 문득 의문스러워진다. 열차는 멈출까? 그 마음을 읽은 듯이 소녀가 이야기한다.
멈추길 바라?
……언젠가는.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난 상관없어.
간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티켓. 두껍고 반들반들한, 붉은 종이에 금박으로 장식체가 찍혀 있다. 소년은 그 문자를 매만진다. 결심한 듯 뱉는다. 내리지 않으면, 열차에 타고 있는 의미가 없으니까.
……알겠어.
너는?
네가 바라는 대로 할게.
그래도 괜찮아?
괜찮아. 어떤 곳에 머물고 싶니?
예전에 있던 곳이 아니라면 어디든지.
네 과거?
자신의 과거밖엔 가질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그 순간 스피커가 울린다.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멜로디가 두 사람의 목소리를 지운다. 차체가 조금씩 느려진다. 긴 이명과 발밑이 꺼지는 듯한 느낌. 이윽고 완전히 멈췄을 때, 그들은 손을 잡고 내렸다.
2
플랫폼의 천장은 올려다보기 힘들 정도로 높고, 스테인드글라스가 여과한 햇살이 행인들의 옷을 물들인다. 강렬한 빛 속에서 그림자는 구두 아래로 숨어버린다. 만인이 백색 정장을 입고 같은 색의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매번 색다른 형상으로 변모했고 가운데서 누군가를 특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만이 광경에 녹아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소년과 소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대리석으로 마감된 벽을 짚고, 섬세한 카펫이 깔려 발걸음 소리가 묻히는 카펫을 밟고 그들은 새로운 세계를 헤맨다. 긴 무빙워크나 복도, 구름다리, 홀에 입장할 때마다 거대한 액자가 걸린 모습을 보지만 모두 동일한 그림이다. 검은 인영이 왕관을 쓰고 빛의 구체를 어루만지는 회화가 수천 점은 걸려 있다. 액자의 화려한 금칠과 섬세한 조각을 각기 비교하며, 소년은 차라리 프레임의 차이점에 주목하는 편이 흥미롭겠다고 여겼다.
걷다 지친 두 사람은 벤치에 주저앉았다. 새하얀 의자는 전시회 한복판에 놓여 있다. 그들의 머리 위에, 사방의 벽면에 크고 작은 액자가 걸려 있지만 내용은 새삼스러울 만큼 동일하다. 그러나 아무리 고개를 돌려도 같은 그림뿐인 갤러리에서 관람객들은 찬사를 뱉는다. 하나하나의 작품을 다른 것으로 취급하며 감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탄식하지만 언어를 구현하지는 않는다. 기묘하고, 현실감에서 동떨어진 정경. 소년이 소녀에게 귓속말한다. 이상해. 그들 눈엔 다른 무언가 비치기라도 하나?
구멍 하나 안 뚫린 가면인걸. 무언가 볼 수 있기는 해? 소녀가 더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저 사람들에겐 우리가 안 보이는 것일지도 몰라. 소년은 자신의 오른쪽 무릎을 주무른다. 연결부의 통증은 개선되지 않고, 그는 겉옷 주머니에서 마지막 진통제를 찾아 삼킨다.
어쩌면, 소녀가 놀랍지는 않다는 투로 말한다. 우리도 가면을 써야 그들 속에 녹아들 수 있나 봐.
이곳 사람들은 전부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이야? 우린 아직 역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했어.
역 자체가 그들의 세상일지도.
불가능해. 역은 과정이잖아. 소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가자는 듯 손짓한다. 소녀가 따라 일어선다. 소년은 문득 소녀의 구두 리본이 풀린 모양새를 본다.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발목에 걸린 리본을 고쳐 맨다.
왜소한 신발 두 쌍이 개표구에 멈춰 선다. 궁궐 같은 옥내에 비해 그곳은 초라한 나무문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소년은 발돋움해서 문에 달린 비좁은 창 너머를 본다. 빛에 길들여진 눈이 어둠을 읽어들이는 동안, 수많은 가면의 사람이 스쳐 지나가고 그들 가운데 문을 열고자 하는 이는 없다. 달도, 별도 존재하지 않는 깜깜한 하늘 아래 펼쳐진 사막. 지평선의 끝까지 검붉은 모래사장뿐이다. 생명의 흔적은 관찰되지 않는다.
출구를 잘못 찾은 것 같아. 바깥은 폐허야. 소녀가 따라 창을 들여다본다. 동시에, 누군가 소년의 말을 모방한다.
─ 바깥은 폐허야.
누구지? 소년이 주변을 둘러본다. 시시각각 이동하는 행인. 섞여들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친히 말 거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소녀가 무언가를 가리킨다. 그들은 익숙한 액자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는다. 광구를 어루만지며, 그림자가 발음한다.
─ 너희는 누구지?
그림이 말하고 있네. 소녀가 태연히 손가락질하고, 소년은 그 손을 잡아내린다. 기분 나빠. 소년이 몸서리친다.
─ 보고 싶다면 가면을 써라.
어린아이도 노인도 아닌, 개인도 다수도 아닌 목소리가 명령한다.
─ 속하고 싶다면 자신을 비워라.
검은 손은 햇빛을 어루만지고 알갱이로 분해한다. 구들은 모양을 갖추고 발치에 떨어진다. 싫어. 소년이 소리친다. 그는 가면을 짓밟는다.
─ 믿지 않는다면 추방할 뿐.
아울러 지나가던 모든 이가 멈춰 선다.
뭇사람의 시선이 소년과 소녀를 향한다. 두 사람은 형체 없는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내리는 게 아니었어. 소년이 고개를 떨어트린다.
그럼. 열차로 돌아갈래?
벌써 떠났을 거야.
떠나지 않아. 살얼음 위를 걷는 긴장감 속에서 소녀가 그를 이끈다. 네가 바라는 한 그것은 떠나지 않아. 어쩌면, 아직 내리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소녀가 두 가면을 주워 든다. 그러자 무대의 새로운 막이 시작된 것처럼 신의 그림은 입을 다물고 행인들은 제각각 흩어져버린다. 시선이 거두어지고 그들은 거미줄에서 내려온다. 왔던 길을 되짚어 달려가 플랫폼에 도착한다. 열차는 떠나지 않은 채였다.
문이 닫히기 직전 소녀는 레일 위 가면을 떨어트렸고, 두 사람이 올라타자마자 차체는 달리기 시작했다.
3
이 열차에는 왜 우리밖에 없을까? 분명 수많은 사람들이 표를 샀을 텐데…….
그건 언제의 기억이야?
창문은 눈 덮인 산의 봉우리를 비춘다.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설치된 철길. 거친 눈발이 강물 속에 뛰어든다. 둑 건너편 늘어선 색색의 지붕. 새파란 하늘 아래 선명하게 빛나는 가로등과, 복잡하게 얽힌 전선. 이전의 경험에 비해서 지나치게 평이한 이미지였다.
……이봐, 우리는 열차에 탄 거지? 이번에는 열차의 세계 따위에 들어온 건 아니겠지?
네가 돌아가고 싶은 곳을 정하지 않는 한, 그 질문에 의미는 없어.
소년은 반박하려다 말고, 짧게 한숨을 내뱉는다. 그는 포크를 고쳐 쥔다. 접시에 놓인 조각 케이크. 생크림과 딸기. 식당칸에서 유리잔을 찾고 물을 따르고 케이크를 자르고, 다시 좌석으로 돌아오는 동안 줄곧 두 사람이었다. 다른 승객은 나타나지 않았고, 새로운 역에 도착하지도 않았다.
소녀는 케이크를 무너트리는 일에 집중한다. 나이프로 몇 번이고 찔러서 크림과 케이크 시트를 분리한다. 탐욕스럽게 파괴하지만 섭취하지는 않는다. 마치 케이크 속에 감춰진 레시피라거나 본질을 발굴하기 위한 것처럼.
아까워. 소년이 질책하지만, 상대는 옅게 미소 지을 뿐이다.
생일 파티 같네. 대답이 되지 않는 문장이 돌아온다.
생일 따위…….
축하받는 건 싫어?
글쎄……. 굳이 따지자면 태어난 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런 속내는 케이크 조각과 함께 삼켜버린다.
그런 곳으로 가 볼래?
입안에 단맛이 퍼진다.
4
일어나.
다정하게 매만지는 손가락과 햇빛으로 달아오른 베갯잇이 뺨에 닿는 감촉.
일어나, 에이드리안.
아침에 우는 새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오늘은 네 생일이잖아. 가족 모두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
에이드리안이 눈을 뜬다. 아리아가 그를 내려다본다.
아리아…….
응.
머리카락 잘랐어?
아주 조금. 빨리 옷 갈아입는 게 좋을걸.
……알겠어. 에이드리안은 잠옷 소매를 매만지다가 멍하니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이불에서 빠져나온다. 마룻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피해 방을 가로지르고, 옷장을 연다. 그가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는 동안, 아리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책을 줍고 정리한다.
에이드리안, 또 늦게까지 책 읽다가 잔 거야?
아니.
거짓말. 지난번에도 혼났으면서.
마음대로 생각해.
생일 선물 맞춰봐.
내가 어떻게 알겠냐…….
문고리를 돌릴 때, 아리아가 그를 붙잡았다. 빠트렸어. 붉은 리본 타이를 매주며, 그녀가 말한다.
두 사람은 나선계단을 내려와 거실로 향한다. 아름답게 손질된 봄의 정원이 창호 가득 펼쳐져 있다. 시폰 커튼이 흔들리며 윤슬처럼 햇빛을 투과시킨다. 동백나무 잎이 물결치며 파도 소리를 낸다. 테라스에 놓인 식탁과 파라솔. 먼지 한 점 묻지 않은 하얀 테이블보와 선물 상자들. 정갈한 식기와 애피타이저. 딸기 생크림 홀 케이크. 불붙이지 않은 초…….
─ 어서 오거라.
─ 어서 오렴.
의자에 앉아 있던 양친이 손짓했다. 부족함 없는 광경을 지켜보며, 에이드리안은 생각한다.
내 생일이 봄이었던가.
그는 부모님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들의 낯은 기름에 종이를 빠트렸다 건져 올린 듯 일렁이며 상을 맺지 못한다. 아리아가 에이드리안 몫의 의자를 꺼내며 함게 손짓한다. 앉으렴. 에이드리안이 착석하면, 그녀는 색종이를 오려 만든 고깔모자를 소년에게 씌워준다. 그를 제외한 이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케이크의 초에 불을 붙인다. 몇 개? 불이 흩어지지 않도록 가볍게 손뼉을 친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인가? 촛농이 크림 위로 떨어진다. 오후의 태양이 작열한다. 〈즐거운 나의 집〉 식은땀이 흐른다. 여기는 어디,
훅, 소년이 촛불에 입김을 불어 넣는다.
암전?
5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철컥, 소진된 탄약이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다. 그 소음은 비명에 묻힌다. 누군가 끊임없이 소리친다. 절규하거나 오열한다. 도움을 요청하거나 비난하거나 후회하면서. 울음소리는 귓가에 걸린 듯 맴돌다가 지평선 끝으로 멀어진다. 그리고 익숙해진다.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 상처라거나 입안에 줄곧 맴도는 재와 혈액의 씁쓸함, 가스총을 점검하는 기계적인 동작과 같이.
돌아가봤자……. 에이드리안은 거칠게 내뱉었다. 갈라진 목소리에 정제되지 않은 증오가 담겼다. 이미 늦었어. 그는 단언한다.
아리아는 난간에 기대, 지도를 들여다본다. 마천루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장난감 블록처럼 작고 초라했다.
우리가 여기 얼마나 있었지?
…하루?
이곳에 말이야.
입대는 둘 다 십 년 전이었지……. 머리 부딪혔어?
한밤중, 급작스러운 공습으로 그들의 기지는 화염에 에워싸였다. 지휘하는 이들은 어디론가 증발하고, 동료들은 화마의 손아귀에 으스러졌다. 바라마저 않았지만, 마침내 모든 의무로부터 도망쳐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돌아가자니.
맹목적인 목표는 시간을 가속시키지. 네가 바라는 건 뭐야.
모르겠어. 에이드리안은 자조한다. 이제 와서.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죽어도 좋아?
설마. 경멸하면서, 그는 내뱉는다. 돌연히 비명이 멈춘다. 거대한 손에 의해 강제로 두 귀를 틀어막힌 듯이 먹먹한 정적이 찾아왔다가, 열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지. 이곳은 빌딩의 옥상이며 이제 기능하는 역 따위 남아 있지 않을 텐데. 하지만 경적은 가까워진다. 플랫폼에 서 있을 때, 기차가 달려올 때 스치는 상쾌한 바람. 그것이 피부를 잠식하려 든다. 그는 무심코 총을 떨어트린다.
어떻게든 살아남겠어.
환각을 떨쳐내려는 듯 에이드리안이 소리친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 그는 자신을 향해 겨눠진 총구를 마주한다.
그렇다면 다음 역으로.
6
의식은 언제나 타들어가는 아픔으로 시작된다. 더는 울부짖지도 않는다. 감각이 되돌아오는 때는 찰나에 불과하다. 곧 얼어붙어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될 테니. 정신의 관을 이동시킨다─육체의 동작에는 그런 의미밖에 없었다.
나의 행성은 영원히 내리는 눈의 저주에 걸려 있었다.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된 비극인지 기억하는 이는 없고, 인류는 다만 두 갈래로 나뉘어 행동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분류된다.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은 영원히, 만년설이 침범할 수 없는 성벽을 구축한다. 자신 역시 쌓아 올리는 자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내부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알아낼 길은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완성된, 절대로 속할 수 없는 성역을 올려다보며 잠에 들었고 고통 속에서 깨어났다. 다섯 해가 되었을 때 일터로 갔다. 괴롭다고 여기지만 괴롭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일곱 해가 지났을 때 하나뿐인 혈육이 성벽에서 떨어졌다.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나겠다고 마음먹지 않는다. 시체는 바닷속으로 추락했고 영영 찾을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이 흐른다. 누군가 십 년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얼음 벽돌을 재단할 도구가 떨어지고,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하나둘 떠나고, 돌처럼 얼어붙은 시체를 대신 쌓아 올리다가 결국 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성의 꼭대기에서 누군가 추락했다. 나는 그의 소매에서 티켓을 훔쳤다.
그만둬.
티켓에 표기된 시간, 아무도 없는 역에 열차는 도착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나는 여기 내리기 위해 너를 만난 게 아니야!
소년이 던진 티켓은 설풍이 앗아가 버린다. 그는 차량에 오르지 않는다. 빙원을 달리던 몸이 눈 속으로, 지면 아래로 점차 파고들더니, 아무리 손을 뻗고 허우적대보아도,
머리 위의 희미한 빛에는 닿지 않고
7
소년이 눈을 뜬다. 누군가 그의 손을 잡아 물속에서 일으킨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던 파도를 딛고 서면 그것은 발목을 조금 적실 정도의 높이에 불과하다. 넓은 평원에 천천히 흐르는 물은 하늘과 대지의 경계를 흐리고,
과거로밖엔 돌아갈 수 없어. 소녀가 말하며, 그의 손을 놓는다. 두 사람의 잔상이 천지만이 존재하는, 커다란 거울 세계에 놓인다.
이름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운명을 갈아타는 사람에게, 이름 따위 필요 없어.
너는?
운명에는 옮기는 작용만이 필요할 뿐.
이곳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최초의 인류가 되는 건 어때? 우리는 재앙의 불을 지피기 전으로 돌아온 거야. 처음부터 네 의도대로 써 내려갈 수 있어.
나는…….
…….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죄를 짊어지고 싶지 않아. 너를 포함해서.
……네 뜻이 그러하다면.
8
어째서 미래로 가지 않는 거야?
이 우주에 더는 미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야.
너는 누구지?
나는 너의 의식. 생각의 태초로 거슬러갈 수 없는 것처럼 상처의 피를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존재는 모든 기계의 몸에 깃들어 있어. 네가 과거에 안착하면 나는 사라져. 사람들은 나를 통해 운명을 갈아타.
운명을 갈아탄 사람들은 어떻게 돼?
미래를 잊고, 현재를 버리고, 과거에서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지.
결국 나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구나.
어스름 속에서 나지막한 울음이 들려오다가, 곧 멈췄다. 아무도 그사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이 우주에 더는 시간 따위 흐르지 않았으므로.
그렇다면 나는 열차에서 내리지 않겠어.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어. 여행은 무한하지 않아.
기억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으니까, 네 곁에 있을게.
그렇다면, 너는 언젠가 우주에 혼자 남겨지겠구나.
그래. 우리 둘만은 진정한 끝을 맞이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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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일시를 인지하면 시간은 빠르게 지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런 것조차 이제 감지할 수 없고, 우리는 이곳에 가라앉을 것이라고 너는 말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백은 충분히 있었다. 두 사람의 이름을 결정할 만큼은.
어느 순간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마주 보는 좌석, 풍경을 비추는 창문, 기분 좋게 진동하는 엔진음. 열차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혼돈으로 화하고, 찰나일지 영원일지 알 수 없는 순간 서로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들은 촛불을 사이에 두고 누워 있다. 연소가 불완전해지고, 산소는 흩어진다.
잘 자, 에이드리안.
잘 자, 아리아.
두 사람은 촛불에 입김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빛이 사라졌다.
2024-06-15 연성교환
참고 작품: Geoffrey Landis(1988), 『Ripples in the Dirac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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