意識=認識
Top

Anemoia

Novel

2024. 12. 27.

Antent - first snow

연우는 눈을 뜬다. 그가 암흑의 세계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감지한 것은 향기였다. 소독약, 아로마 디퓨저, 가습기 수증기가 뒤엉켜 좁은 방을 채운다.
왜 돌아왔어? 한율이 날카롭게 쏘아붙인다.
비현실적인 향기에 둘러싸여 연우는 휘청거린다. 그는 보호자용 침대에 걸터앉는다. 환자복을 입은 한율과 시선이 마주친다. 그제야 이곳이 병실임을 깨닫는다. 연우는 대답하지 않고 창가로 향한다. 커튼을 걷는다. 서리가 낀 유리를 손바닥으로 문지르자 도심의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실외 아이스링크를 둘러싼 루미나리에, 광장의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가지각색의 전구에 휘감겨 반짝이는 장난감 도시. 손이 닿지 않는. 일순, 병원 건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은 새하얀 정사각형의 방에 단절되어 별바다를 떠돌고 있다.
연우야.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상을 드문드문 내려다보며.
……한율 씨?
한율은 병상에서 몸을 일으키고, 손등의 점적주사를 거칠게 떼어내고, 맨발로 창문 앞까지 걷는다. 브라운관 TV에서 쏟아지는 취광에 눈이 멀어버린 듯이 연우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멍하니, 침묵하며, 다음 대사를 잊은 배우처럼 한율의 낯을 바라본다. 오랜 투병과 입원 생활로 거칠어진 피부, 생기를 잃은 눈, 마른 입술, 가라앉은 목소리가 자신만을 위한 저주와 원망의 문장을 쏟아내기를 기다리면서. 그러나 돌아온 것은 한 번의 파열음이었다. 
연우는 말없이 자신의 뺨을 매만진다.
아직 기회가 있다고 여기는 것 같은데. 그건 네 착각일 뿐이야. 제대로 대답해.
저는……그냥, 걱정이 되어서. 한율 씨가…….
도망쳤잖아.
잠깐 나갔다 온 것뿐이에요.
내가 믿어줘야 할 이유가 있나? 돌아가. 이제 필요 없으니까.
한율의 냉담한 거절에도 연우는 줄곧 창가를 지킨다. 숨 막히는 대치를 깨트리는 노이즈. 호흡이 긴 백색소음이 멎고, 무대 바깥의 빛이 닿지 않는 곳에, 협탁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라디오에서 누구의 것도 아닌 음성이 흘러나온다.
─1999년 7월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올 것이다.
그러자, 두 사람의 시선이 달력으로 향한다. 
「크리스마스도 지나버렸네요…….」
「글쎄. 준비했어?」
「네…….」 연우는 보호자용 침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숄더백으로 손을 뻗는다. 라디오를 멈춰야겠다고 생각한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가 1999년까지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뭘 망설이고 있는 거야? 내려놔.」
연우는 숄더백에서 약 케이스 하나를 꺼내 협탁 위 올려둔다. 그리고 라디오 전원 버튼을 누른다. 
─종말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다.
협탁에 라디오 같은 것은 없다. 한율이 너그러운 투로 연우에게 앉으라 권한다. 연우는 혼란에 빠지고, 비틀거리며 침대에 주저앉는다. 
─종말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다.
눈이 오네요. 연우가 중얼거린다. 12월까지 넘어간 달력에는 어떠한 표시도 없고 다음 해의 1월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망설이는 거야? 누군가 부추기듯 속삭인다. 한율이 라디오 다이얼을 돌린다. 단정한 음색의 캐럴. 이곳에 라디오 따위 없는데. 눈보라 속에서 부유하는 하얀 방. 눈이 쌓이면 사라져 버릴.
어느 순간 한율의 손바닥 위 붉은 알약 두 개가 놓였고 연우가 손을 뻗는다. 그는 한율의 창백한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다가, 약을 모조리 움켜쥔다.

✻ ✻ ✻

똑, 똑……. 
핏물이 떨어지는 소리인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인가. 
식어버린 욕조에서 빠져나왔을 때 발밑에서 바스락, 하고 무언가 이지러졌다. 방수 시트에 감싸인 토막 난 육체. 핏기가 완전히 빠져, 새하얀 나무토막처럼 변질된 주검을 짓밟고 연우는 현관으로 향했다. 젖은 옷의 무게가 그를 자꾸만 지면으로 끌어당겼다.
도어체인을 풀기 전 문밖에서 누군가 소리친다. 나 왔어! 유쾌한 음성.
문을 연다. 현관 너머. 도시의 검붉은 밤하늘에 눈송이가 끊임없이 수놓인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헤맨다. 눈길 위 이곳으로 다가온 발자국은 있으나 돌아간 흔적은 없네. 문 앞에서 증발해 버린 것처럼. 바스락……. 되돌아가는 발자국에 대해 눈치챘을 때. 그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는 손길이 있다. 아니, 자세히 보면 코트가 아니다. 빳빳하게 물기를 머금고 얼어붙은 의사 가운. 아니, 전부 혈흔이다. 그는 몸서리치며 가운을 떨쳐낸다. 천은 힘없이 펄럭이며 얼어붙은 땅에 가라앉았다.
쾅.
문을 닫는 소리인가, 다른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인가.

✻ ✻ ✻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이한율이 간청하는 모습을, 김연우는 그날 처음 봤다. 시간은 오후 6시 반. 한 입도 대지 않은 병원식을 물리고 한율은 그런 말을 했다. 어쩌면 지시일지도. 
하지만 요구의 내용은 처음 듣는 것이 아니었다.
「한율 씨, 분명 오해일 거예요. 저도 병문안 올 때 가끔 이야기하는데 그 의사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네가 속고 있는 거야.」
「전부 괜찮아질 거예요.」
「거짓말.」
「우리가 그런 짓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
「거짓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공기는 침체된다.「죽여.」 한율이 음산하게 뇌까린다. 연우는 고개를 젓는다. 
「생각해 봐.」 내가 죽기 전에. 연우는 여전히 고개를 흔들고 있다. 「내가 죽기 전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가정을 그는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렸다. 
「누구 한 명쯤은 죽일 수 있어야, 정당한 것 아닐까.」
한율이 연우의 두 어깨를 붙잡는다. 악력이 세지 않은데도, 손길이 무겁게 느껴진다. 「아니면 네가 그 역할을 자처해 줄 거야?」
동시에 익숙한 소음이 섞인다.
쾅……. 
물체가 낙하해 지면에 부딪히고 산산조각 나고, 떠밀었을 때의 감각은 부드러운 공기를 손에서 굴리듯 여전히 남아 있는데
눈이 계속 내려서…….
너는 다음 무대로 못 가. 한율이 말한다. 
안 가요. 이 악몽을 끝낼 방법이 없음을 이해하면서 연우가 대답한다. 그는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창가까지 간다. 커튼을 걷는다. 지금 이곳에서 뛰어내린다면. 중력가속도가 산정한 몇 초 동안 눈부신 도시의 밤이 그에게 다가와, 두 팔로 감싸안기 불가능할 만큼 커져서 한 번의 충격으로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12월 31일에. 세계가 멸망해 버린다면 좋을 텐데…….」 독백하고, 다시 한율 쪽으로 돌아섰을 때 
상대는 어째서인지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 ✻ ✻

연우가 콘비프 통조림으로 가득 찬 배낭을 메고 귀가했을 때, 현관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신발장 앞에 쓰러진 송장이었다. 마구잡이로 찢어진 방한복과 그보다 더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 목 위로는 형체가 없다. 
한율이 도끼를 쥐고 있다. 
설풍이 실내로 몰아쳐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짓뭉개진 살점과 근육이 나무 바닥의 틈에 하염없이 스며들고 있다. 그것은 마치 기름을 잔뜩 넣고 끓인 고기 스프처럼 보인다.
휙, 육중한 물체가 공기를 가로지르는 소리가 한 번 울리고 도끼날이 판자에 처박힌다. 연우의 운동화에 혈액이 튄다. 질척하고 검은 타르 같은 피가 발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저 왔어요, 한율 씨.
……그래. 한율은 뺨에 묻은 피를 소매로 문질러 닦는다. 그는 도끼를 빼내려 들지만, 얼어붙은 나무는 칼날을 내주지 않는다. 한율이 도끼 손잡이를 걷어찬다.
들어와.
그들은 시체를 밟고 거실로 향한다. 한율이 낡은 공구로 라디오를 수리하는 동안 연우는 노트를 펼친다. 전기난로의 불빛이 상처 난 손가락에 스며드는 아픔을 무시하면서 기록을 이어간다. 식량과 식수의 수량 체크, 또 하루가 지났다는 표시, 현재 위치, 날씨……그리고…….
치지직─. 라디오가 연결되면서 침묵이 부서진다. 스피커에서는, 재난 시 생존자 안전 행동 수칙에 대한 뉴스 대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1999년 7월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올 것이다.
누구 목소리였더라.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지구가 멸망한다는 문장을 접할 때마다, 연우는 만화영화의 연출처럼 행성이 두 쪽 나서 지상에 살던 모든 것이 우주로 튕겨 나가는 장면을 떠올렸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가 1999년까지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칼날에 베인 상처를 치료할 때 반창고를 붙이는 것만으로는 벌어진 피부가 하루 만에 회복되지 않듯이
─종말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다.
끝에는 시작도 중간도 마무리도 있고, 지옥에 당도한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릴 수 없다. 
쉬지 않고 기묘한 문구를 읊는 라디오를 한율이 쓰다듬는다. 이것이 고쳐진 상태라는 듯이. 만족스러운 시간은 금방 흩어져버리고, 그는 기침한다. 가벼운 기침으로 시작하여 신음과 토혈이 섞이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다. 
부축하기 위해 뻗은 손은 내쳐진다.
연우가 먼지투성이 구급상자에서 약 케이스를 꺼낸다. 
─종말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다.
한율의 손바닥 위 붉은 알약 두 개가 놓인다. 이 약은……. 연우의 목소리가 떨린다.
왜, 또 던져버리려고?
먹지 않기로 했잖아요.
24층 아래로 던져버릴 생각이야? 그럼 어떻게 될까? 
한율이 라디오를 내던져버리지만 예언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테라스로 달려간다. 연우는 외투를 챙겨 뒤따라간다. 
─사람의 손으로
한율은 소형 주택 일 층의 테라스 난간─당연하게도 고도가 없는─에 기대 지면을 내려다본다. 혈흔은 대부분 사라졌다. 눈에 파묻혀. 연우가 어깨에 걸쳐준 코트는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지고, 추위에 몸이 떨린다. 형편없이.
무엇이든 전부 네 탓이라는 걸 잊지 마. 불현듯 머릿속에서 울리는 음성에,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달칵.
거실. 녹색 테이블보가 덮인 식탁. 케이크 상자를 연다. 나이프로 가르고 흰 식기에 담는다.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말없이 두 사람은 케이크를 먹는다. 달칵. 나이프와 포크를 움직이는 음색이 퍽 가정적이다. 홍차와 잼의 달콤한 향기가 공기 중을 맴돌며 시체 썩는 냄새를 가린다. 아니, 시체는 썩지 않았다. 한겨울의 눈밭에 곤두박질쳤으니까.
자신 몫의 접시를 비웠을 때, 연우가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한율 씨, 그런데 오늘은……뭘 축하하는 거였죠?
기억 안 나?
한율의 접시에는 처음의 형태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무너진 빵 부스러기와 잼 덩어리가 뒤엉켜 있다. 그는 지루한 듯이 계속 포크를 움직인다. 달칵……. 은빛 커틀러리가 육편을 다지고 붉은 시럽이 잇새를 파고든다.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모르겠어요.
기억도 안 나면서 케이크는 왜 준비한 건데?
그건……한율 씨가 사 오신 것 아닌가요?
요즘 내가 집에서 나가는 모습 본 적 있어? 
……어라. 없, 을지도…….
달칵, 달칵, 달칵.
애초에 축하하려면 촛불이라도 붙였겠지. 이미 먹어버렸잖아.
그렇네요,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이제 좀 조용히 하지 그래.
네? 그건 한율 씨가……. 
하지만, 한율은 두 손바닥을 들어올려 보여주는 제스처를 취한다. 항복하겠다는 듯이. 그럼, 이 소음은 뭐지? 
달칵
연우야. ……마술 하나 보여줄까?
네?
무척이나 이한율답지 않고, 상황에도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었다. 아연실색한 연우에게 한율이 지시한다. 네 손 안을 봐. 연우는 포크를 쥔 오른손을 내려다보지만, 그곳에는 포크 대신 다른 물건이 들려 있다. 이것이 TV 쇼였다면, 자신이 한율의 마술 공연에 초대된 게스트였다면 기쁨과 놀라움으로 감탄했겠지만, 그는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달칵, 하고 손안에서 버튼 누르는 소리가 울린다. 지금까지 줄곧, 이걸 누르고 있었던 건가. ─내가.
그만두는 게 나을 텐데.
달칵달칵……몇 번이고, 일정한 간격으로, 감흥 없이 너스콜 기기의 버튼을 누른다. 한율이 상냥하게 속삭인다. 눌러 봤자 늦었거든.
뭐?
의문을 떠올리는 순간, 
─쾅.
얼어붙은 의사의 시체가 두 사람의 식탁 위로 추락했다. 

✻ ✻ ✻

12월 31일에. 세계가 멸망해 버린다면 좋을 텐데.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다.
눈이 내린다.
넘어가지 않는 달력.
그 사람은 죽었어. 
내가 죽기 전에.
무너진 케이크
전부 너 때문이야.
누구 한 명쯤은 죽일 수 있어야, 정당한 것 아닐까.
시나리오
한율의 손바닥 위에, 붉은 알약 두 개가 놓였다. 
그리고 연우가 손을 뻗는다. 약을 모조리 움켜쥔다. 잠깐─한율이 마저 소리치기도 전에 그는 창가로 달려간다. 「세계는. 12월 31일에 멸망하니까.」
「그럼 이것도……당신도, 나도, 전부.」 돌아보는 낯은 활짝 웃고 있다. 
「필요 없는 거잖아?」

✻ ✻ ✻

부러진 손톱 틈으로 얼음 알갱이가 파고든다. 없어. 날벌레가 빛에 이끌려 가로등 전구와 충돌할 때마다, 노란 광원이 깜빡인다. 
「없어…….」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아, 중얼거리며, 맨손으로 눈밭을 파헤치는 연우의 모습을 행인들이 곁눈질하며 지나친다.
「한율 씨가 슬퍼할 텐데……어째서 그런 짓을 저지른 걸까?」
하얀 입김이 흩어진다. 돌아가야 해. 제대로 서는 것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어디로 돌아가야 하지?
그때, 시계탑의 종이 울리기 시작한다.
하나.
─12월 31일에. 세계가 멸망해 버린다면 좋을 텐데.
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그가 1999년까지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지.
셋.
─종말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어.
넷.
─뇌가 해석한 시각 정보만이 세계의 전부인 게 아냐, 모든 것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져 
다섯
─죽였어……. 내가……드디어……. 됐다! 이걸로, 이제. 아, 한율 씨……. 그쪽에서 다리 좀 잡아주실래요?
여섯
─아무도 우리를 의심하지 않아. 뭘 그렇게 두려워해?
일곱…….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배낭에는 3개월분의 콘비프 통조림이 들었고, 최근 한율의 컨디션도 많이 회복되었다. 장작으로 사용할 나무를 주변에서 찾기 어려워졌다는 점이 문제인데. 여덟. 거처를 바로 옮기기에는 아직 지리 파악을 덜 해서.
아홉.
……병동으로 돌아가야 해. 
연우는 있는 힘껏 달리지만, 열 번째 종이 울렸을 때 넘어지고 만다. 나는 왜 달리고 있지? 그는 문득 생각한다. 
나는 한율의 장례식에 참석했던가?
열한 번째 종이 울린다. 때늦은 캐럴이 경음에 섞인다. 
당연히, 두 사람이나 죽였다는 의심을 받고 싶지 않으니까!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베란다 너머로 약을 던져버렸을 때. 한율에게 천식 발작이 일어났다. 그는 호출기 버튼을 누르려 했다─누르지 못했다. 손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을 오늘 우리에게 베푸시니…….
싸늘한 타일 바닥에 뒹굴고 바르작대며, 물 위로 나온 생선마냥 꿈틀거리는 육신을, 연우는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천하 만민은 화해하네
열두 번째 종이 울린다. 남겨진 이는 눈을 질끈 감는다. 그러나 눈을 다시 떴을 때.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
─지극한 사랑이여
시체가 추락한다. 
송장의 머리는 뾰족한 난간에 부딪히고, 폭죽처럼 펑 터져버린다. 뇌척수액이 섞인 핏물이 튀고, 시야 절반을 가린다. 
지극한 사랑이여. 죽은 자의 입이 움직인다. 쓸데없는 일에 진 빼지 말고 들어와. 장작 불이 꺼졌어.
시체는 추락했지만, 연우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가 독백한다. 거짓말…….
하지만 어디서부터? 내레이터가 반문한다. 
아, 유의미한 질문이었어.
시초를 헤아리기 위해, 배우는 눈을 감는다. 관객 없는 무대에서. ■


사건 순서

10월경 한율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게 되어 입원 생활을 시작한다. 연우가 매일 병실에 찾아가지만 좀처럼 좋아지지 않은 채 12월이 된다. 
연명치료에 지친 한율의 정신상태는 악화되어 의료진을 포함한 주변 모든 사람을 의심하게 되고, 주치의를 죽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연우가 거절하자 가스라이팅을 통해 강제로 협력시킨다. 연우가 12월 31일에 세계가 멸망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밤의 병실에서 의사를 살해하고 난간에서 떨어트려 죽인다. 수사 과정에서 의심을 받지만 어떻게든 혐의에서 벗어난다(이 과정에서 연우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같은 시기, 한율은 연우에게 1월 1일은 오지 않고 세상이 멸망하는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연우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해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자살을 위한 약을 구하기 시작한다.
31일 당일. 대화 중 종말 시나리오를 진심으로 믿고 착란에 빠진 연우는 기껏 구해온 약을 창밖으로 던져버린다.
두 사람은 다투고, 그러던 중 한율에게 천식발작이 찾아오지만 너스콜을 누르지 못하고 쓰러진다. 연우는 그를 지켜만 보다가 병실 밖으로 뛰쳐나온다. 하루인지 한 달인지 일 년 후인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시간 후, 한율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지만 연우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는 이후 환각이나 환청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2024-12-27 커미션

意識=認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