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07. (MON) 17:31
「둘 중 아무도 포기해선 안 돼요. 우린 같은 배를 탔으니까.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생사를 함께 해야 돼요. 기억하나요?」
「물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내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듯이요. 그 전차 얘기 말이에요. 모든 게 끝날 때까지 내리지 못한다는 것도요. 무덤이 있는 그곳 말이죠.」
07. 04. (FRI) 11:58
비디오테이프, DVD와 블루레이가 담긴 아마레이 케이스, 덩굴처럼 얽힌 케이블. 『Empire』, 『Cinefex』 최신호. 낡은 전공 서적들. iPod과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각종 기록 매체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어지럽혀진 거실.
혼란 가운데, 시즈코 쇼토는 망연히 서 있다. 피자 박스를 들고.
"하나비시?" 부드러운 여름밤의 공기 속, 꽉 막힌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봐, 우리 이사 가?"
생활 소음이 연이어 들려온다. 무거운 상자를 내려놓고 비닐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파헤치는 소리. 달칵, 플라스틱 케이스를 여는 소리.
"스즈키 씨……상사가 신축 카지노에 가 보자고 하잖아. 긴자역 근처에. 50만 엔 갖고 시작했다가 이거 살 돈 빼고 다 잃었어."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하나비시 요시히라의 뒤통수가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시계도 벗어주고 올 뻔했다니까."
먼지 냄새와 더블 크러스트 페퍼로니 피자 L사이즈가 풍기는 고소한 버터 향기가 섞여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기억 저편의 일화를 떠올려내기 전 향기는 흩어진다.
"뭐 찾는 중이라서." 하나비시가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뭔데?"
"영화. 장면은, 생각나는데……제목을 모르겠어."
"지금 쓰는 작품에 필요해?"
"그건 아닌데. 떠오르지 않으니 불쾌하잖아."
"흐음."
하나비시가 철제 선반 꼭대기에 나열된 리빙 박스를 하나씩 열어보고, 책상 서랍을 뽑아내 이불 위에 엎고, 신경질적으로 좁은 방 안을 빙글빙글 맴도는 꼴을 시즈코는 빤히 바라보고만 있다. 질리지가 않네.
"피자 먹을래?"
"나중에."
아, 그래. 도와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방해만 된다고 하겠지.
거실 테이블까지 점령한 잡화를 밀어내고, 피자 박스를 내려놓았다. 2인용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마침 CRT 디스플레이에서 영상이 흐르고 있다.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고전 흑백 영화. 불 꺼진 방에서, 구시대의 디스플레이가 발하는 빛이 시즈코의 실루엣을 검푸르게 적신다.
「정말 무더운 날이었죠, 길가의 하니서클 향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살인에서 하니서클의 향기가 날 줄 몰랐었죠.」
독백은 실패를 예언했으나, 시즈코는 망각한 채 몰입한다. 미지근해진 피자를 기계적으로 씹으며. 주인공은 과연 재물과 아름다운 여자를 둘 다 손에 넣었을까? 트릭을 들키고 궁지에 몰리지는 않을까. 회복되지 않을 인간관계는 어떻게 하지?
「나타날 거야, 반드시 나타날걸. 어디선가, 언젠가는 둘이 만날 거거든.」
「감정이 얽힌 문제야. 사랑이 됐든, 증오가 됐든…….」
「오랫동안 떨어져 있진 못할 테니까.」
하지만, 결말을 목격하기도 전에 잠들어 버린다.
07. 05. (SAT) 13:08
다음 날, 토요일.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시즈코는 몸을 일으킨다. 언제 난장판이었냐는 듯 말끔히 정돈된 공간. 자신의 숨소리밖에 들려오지 않는다. 아, 혼자구나.
하나비시는 영화를 찾았을까?
삐걱거리는 관절을 움직여 일어선다. 다시 하나비시의 방문을 찾는다. 노크 없이 문을 연다.
창문이 없는 방이다. 철제 선반이 사방의 벽을 빈틈없이 채우고, 중앙에 좌상이 놓였다. 테이프를 되감은 것처럼 테이프와 디스크들은 제자리를 찾아갔다. 지난밤의 무질서는 꿈이었던 것처럼. 붉게 녹슨 책장 사이, 그나마의 빈틈은 영화 포스터와 아이디어 메모가 덕지덕지 자리 잡았다. 정리되어 있으나 깔끔하지는 않고, 사용감은 있으나 인간미가 없는 방. 시즈코가 한 발짝 더 내디뎠을 때. 점착력이 동난 메모가 툭 떨어진다. 읽어봤자 모르는 말들뿐이다.
모처럼의 휴일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시즈코는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내고, 아일랜드 테이블에 기대 들이킨다. 마음과 달리 생각은 계속하여 한 갈래로 흐른다. 하나비시의 영화를 본 적 있었던가…….
오늘 저녁 그가 보는 앞에서 재생하면 어떤 반응일까. 검색해서 평가를 찾아볼까? 악플 하나하나 신경 쓰고 마음에 간직할 것 같기도 해.
문득, 같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비시 요시히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비시가 돌연사해서, 참고인으로서 경찰서에 불려 간다고 해도. 그의 생일이나 혈액형, 인간관계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비시는……차가운 커피를 좋아했지. 필기할 때 볼펜보다 연필이 좋다고 말했어. 연필은 칼로 깎았고. 내가 외출할 때 가끔 원고지나 지우개 같은 문구용품을 사 오라고 부탁했는데. 파란 선 원고지를 사 가면 좋아하지 않았어. 빨간 선 쪽이 25엔 더 저렴하고 쓰기도 편하다고……. 수사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의심을 살 것만 같다.
투명한 시폰 커튼 속으로 빛이 파고든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린다.
일순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오고서야, 맹렬히 울부짖던 매미 소리가 멈췄음을 깨닫는다.
07. 06. (SUN) 22:14
GAME OVER─
벌써 세 번째로 맞이한 화면을 노려보다가, 시즈코는 노트북을 덮었다. 광고 팝업이 덕지덕지 붙은 웹게임에 미련은 없다. 아마 더는 접속하지 않겠지. 21세기에 테트리스라니. 한숨을 내쉰다. 결국 일요일 저녁까지 생산성 없이 빈둥거리기만 했다. TV 채널을 돌리고, 수십 개의 숏폼을 넘기고, 포털 사이트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에 이끌려 들어가 관심도 없는 상품의 광고를 감상하는. 의미 없고 평화로운 현대인의 삶을 만끽하면서 바스러진다. 부드러운 소파 쿠션 속으로 한없이 떨어지려는 몸을 일으킨 순간, 경첩이 삐걱거린다. 하나비시가 문을 여는 소리. 한참 방에 처박혀 있더니,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걸까.
"가출?"
"……."
"혹시 데이트?"
"하아."
"어디 가."
"영화관."
"밤 열 시에? 뭐 보는데?"
"상관없잖아."
지갑을 찾는 시즈코를 흘겨보더니, 하나비시가 덧붙였다. "네 표는 안 샀어." 명백히 귀찮다는 어조로.
"가서 사면 되지."
그러면서도, 따라나서는 시즈코를 막지 않는다. 버스로 다섯 정류장 거리에 위치한 낡은 영화관까지 이동하면서, 두 사람은 같은 씬에 존재할 뿐인 엑스트라처럼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았다. 누군지도 모를 주역이 활약하는 동안, 배경 속에서 무심한 표정을 짓는.
10년 전 여름 블록버스터의 재상영. 예전에 본 작품이다. 하나비시도 마찬가지겠지. 왜 영화관까지 보러 온 걸까. 아무리 스크린이……작품 속의 꿈세계가 넓어도……등장인물들은 알려진 결말로 향할 뿐이다. 어두운 상영관. 스크린의 점멸하는 빛에 감싸인 하나비시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언제나 암흑 속을 보는 새까만 홍채. 허구의 세계를 바라보는 눈. 현실을 외면하는 눈.
시선이 마주친다. 그러니까 안 와도 된다고 했잖아. 하나비시가 뻐끔거린다.
"그런 말은 안 했어." 시즈코가 속삭인다.
"조용히 해." 하나비시가 시즈코의 어깨를 툭 친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로부터 엔드 크레딧이 흐를 때까지 얌전히 영화를 감상한다. 그러고 보면 콜라도 팝콘도 사지 않았구나. 주인공이 죽음의 꿈에서 깨어나,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며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잘됐네, 잘됐어. 그리고 영원히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마도? 크레딧이 올라감과 동시에 조명에 빛이 돌아온다. 먼저 일어서는 하나비시의 뒤를 쫓아 극장에서 나서며.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려낸다.
'크레딧이 끝난 다음 밝아지는 상영관이 더 좋아.'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걷는 동안, 어둠에 익숙해졌던 시야 구석구석에서 빛무리가 튀어 오른다. 짧은 현기증이 스친다.
"찾던 게 이 영화야?"
"아니."
"그럼 뭔데?"
"왜 그렇게 재촉하는 거야?" 하나비시는 낙담한 듯이 고개를 떨어트린다. "영화관은, 영화를 본다는 기능만으로……돌아가는 곳이니까. 여기 오면 무언가 떠오를 줄 알았어."
"이번 슬럼프는 오래 가나?"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는 즐거울 수 없다니 작가는 괴롭네.
"남의 일이라고, 막말하기는."
"그래서." 어떤 영화인데? 새벽에 접어들어, 로비에는 두 사람뿐이다. 티켓과 간식을 판매하는 직원이 카운터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하나비시는 우물쭈물하다가, 아직 팝콘 부스러기가 남아 있는 테이블을 손으로 한 번 쓸었다.
비극은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의 연인이 실종되고, 슬픔에 빠진 그에게 처음 보는 주소로부터 이메일이 도착한다. 첨부파일을 확인하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비좁고 캄캄한 방에 갇힌 연인의 모습. 초라한 행색으로 의자에 묶여 괴로운 표정을 짓는.
폭력적인 사진은 매주 도착한다.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일상을, 되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되찾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사건은 뉴스 프로그램에 실려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때때로 범인 취급을 당하고, 매도되었다가 비난하는 편에 서는 날들이 달력을 넘긴다. 그동안 연인은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목은 말라붙고 살이 여위고, 더는 움직이지 않게 되고 부패하여 흘러내리는 동안에도 사진은 도착한다.
검게 말라비틀어진, 사람이었던 것.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당신이 향후 10년 동안 동일한 각도에서 촬영한 시체 사진을 받아보아야 한다고 통보받는다면. 운명에 순응하기 전에 메일 주소를 바꾸는 간단한 시도 정도는 해 보지 않겠는가?
10년 후,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가족과 겨우 되찾은 평온.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문장이 흐르기 직전. 딸아이의 자전거를 꺼내기 위해 뒤뜰의 창고를 찾은 그는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이변을 발견한다. 창고 구석, 낡은 카펫 아래에 숨겨져 있던 지하실의 문.
계시만으로 움직이는 신의 사도처럼 계단 아래로 향한다. 떨리는 두 발이 바닥을 딛고 섰을 때, 손전등 빛에 드러난 것은─
"줄거리는 다 기억하고 있네. 인터넷에 올려봐."
"내가 기억하는 건 마지막 장면뿐이야. 나머지는 희미하지만, 예상하기 쉬운 플롯이니까 살을 덧붙인 거지."
백골화된 사체. 녹아내려 의자와 융합한 모습이 불경한 조각상처럼 보인다.
무릎으로 기어가 제단 아래 엎드린 주인공은 무너진 부전골에 입을 맞추고, 그대로 숨을 거둔다.
"네 꿈이나 메모를 혼동한 것 아냐? 아예 시나리오로 써버려."
"훔치는 건……. 안 돼. 미래더라도."
"이해가 안 되네, 보통 그걸 창작이라고 하잖아."
"네가 그렇게까지 시나리오 작법에 관심 있을 줄 몰랐는데……."
"주에 한 번꼴로 집을 뒤집어 놓거나 창작의 고통에 시달려 앓아눕는 동거인이 있으면. 싫어도 체감하게 되는 법이지."
"시끄러워."
"아무튼. 그럭저럭 무서운 영화네, 범인은 누구지? 그 집을 사게 된 건 우연? 아니면 처음부터 죽은 사람이 꾸몄나."
"그런 것보다, 절망은 어디까지고 따라붙는다는 이야기잖아."
불현듯, 흑백 영화의 대사를 떠올려낸다.
「둘이라서 두 배로 안전하다고 생각할 테지만, 어림없는 소리. 10배나 더 위험하지. 살인을 한 거야! 무슨 전차를 타고 지나가다 각자 다른 역에 내릴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들 둘은 꼭 붙어 있는 거야. 일방 통행로에서 끝까지 계속 같이 가는 거지. 죽음으로 통하는 마지막 역까지.」
"이 플롯만으로는 소구력이 부족해." 시즈코의 생각을 끊어버리듯 하나비시가 중얼거린다.
"소구력이라."
"이야기에 절정이 없고, 제작비용이 아까워. 상영관에 걸릴 수 없지. 그래서 원작을 보고 직접 판단하고 싶은 거야."
"인터넷에 물어보라니까."
하나비시는 골몰하며 침묵했다. 대화의 끝이었다. 시즈코는 혼자서라도 투덜거린다. 전철도 끊어졌고 널 따라 나오느라 차도 안 가져왔고……걸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겠네.
「살인에서 하니서클의 향기가 날 줄 몰랐었죠」
불평이 무색하게도, 새벽의 달콤하고 미지근한 공기는 산책하기 딱 좋았다. 혼자였다면 휘파람을 불었을 정도로.
08. 31. (SUN) 05:48
이후로도 하나비시는 이름 모를 영화를 줄곧 찾아 헤맸다. 도서관, 지역의 영화 박물관, 인터넷의 바다, 침대 아래, 다시 영화관을 오가며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나날이 흘러갔다. 시즈코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하나비시가 틀어둔 영화를 보며 식사하고, 마음에 들었던 장면을 떠올리며 일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영화의 발견은 언제가 될까 생각하며. 상대가 새로운 시나리오를 써 내든, 낡은 비디오테이프 케이스를 들고 오열하든 종지부만 찍으면 되는 일이라 여겼다. 그동안 불쌍했으니까 한턱 내고, 대체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니까 보여달라고 해야지.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어느 흔한 아침. 시즈코 쇼토가 화려한 밤의 시간에서 빠져나와, 구두 뒤축을 꺾어 신고 귀가했을 때. 하나비시 역시 현관에 있었다. 검은 레인코트에 짙은 색의 청바지. 낡은 운동화와 백팩. 신발끈을 매느라 집중하는 하나비시의 이마를 시즈코는 내려다본다.
"가출해?"
"그 레파토리는……질렸어. 조금. 살 게 있어서."
"그래. 난 지금 들어왔어."
"알아."
"샴푸 떨어졌더라."
그러니 사서 돌아오라는 듯이 말하면서도, 하나비시를 붙잡지 않으면 영영 끝장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붙잡지 않는다. 왜 붙잡아야 하는지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지 그다음 우리에게 일어날 상황은 무엇인지. 예상할 수도 예상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지금 하나비시와 현관에서 대치하고 있는 순간만이 중요하게 느껴졌다. 시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영화가 아니니까. 엔드 크레딧이 오르기 전에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는 규칙이 없으니까─
"그럼, 갈게."
끼어들 틈도 없이, 하나비시가 문을 닫고 떠난다. 문손잡이를 당기고 열린 틈으로, 바깥으로 몸을 밀어 넣고 그림자마저 사라졌을 때 재차 손잡이를 당기고. 닫는다. 간단한 동작으로 두 사람은 분리된다.
하나비시 요시히라가 공식적으로 실종된 것은 그로부터 7일 후였다.
두 사람의 공간이었던 집에 하나비시의 부모님이나 경찰이 출입하고, 기자들로부터 플래시 세례를 당하고, 참고인 조사를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고 종이에 적는 동안 시즈코의 역치는 한계에 도달했다. '하나비시 요시히라를 찾아낼 실마리'로서의 자신이 필요 없어진 순간, 그는 도망쳤다.
교외에서 히치하이크를 할 때, 텅 빈 강변도로 에서 최대 속도로 트럭을 몰 때, 우연히 올라간 건물 옥상에서 동이 틀며 움직이기 시작한 도시를 내려다볼 때 영화의 OST나 문장이 뇌리에 스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나비시의 영화.
증발하기 전, 하나비시는 자신의 짐을 처분했다. 세대를 오가는 컬렉션도 원고지 뭉치도 벽을 잠식한 포스터와 메모도 전부 사라졌고. 남겨진 것은 공책 한 권. 인근 편의점 CCTV가 검정 수성펜과 줄 노트를 구입하는 그의 뒷모습을 잡아냈다. 샴푸 이야기를 하기 30분 전이었다.
「스노우드롭의 그림자 아래」
휘갈겨 쓴 문장. 어쩌면 유언일 표제에서, 서브 텍스트를 읽어내기란 불가능했다.
2년 후, 하나비시의 본가에 남겨져 있던 미완성작 콘티가 영화화된다.
4년 후, 하나비시 부부가 배급회사를 상대로 한 계약 위반 소송에 승소한다. 두 사람은 이혼.
6년 후. 언제나 그랬듯 새로운 블록버스터들이 영화계를 휩쓴다. 영상저작물의 통상적인 보호기간은 70년. 그러나 부활 시기는 창작자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기에 무수한 장면이 용암(溶暗)아래 잠들어 있다.
07. 07. (MON) 07:31
6년 후. 시즈코 쇼토는 연인과 함께 나고야시의 아파트에 입주한다. 지쿠사쿠 스에모리토리 1초메.
출근 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TV를 시청한다. 의미 없이 틀어둔 영화 채널. 셔츠 깃을 정돈하고 넥타이를 매고, 양복 상의를 몸에 걸쳤을 때 아무런 징조 없이 그것은 시작된다. 이삿짐들이 담긴 박스 사이에서 브리프 케이스를 찾아 헤맬 때였다.
낯익은 음악, 낯익은 장면.
「둘 중 아무도 포기해선 안 돼요. 우린 같은 배를 탔으니까.」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생사를 함께 해야 돼요.」
「기억하나요?」
잊어야만 했던 기억들이 쏟아져 내려 발목을 붙잡는다.
「물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내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듯이요. 그 전차 얘기 말이에요.」
무슨 전차를 타고 지나가다 각자 다른 역에 내릴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일방 통행로에서 끝까지 계속 같이 가는 거지. 물론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죽음으로 통하는 마지막 역까지. 인생에서 막다른 벽에 부딪혔을 때 도망쳐 새로운 길을 찾는 자가 있고, 그 벽을 숭고한 대상으로 생각하며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자가 있다. 나는 전자였고 그 사람은……설득에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끔찍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벽 앞으로 갔다.' 이렇게. 시즈코는 가방을 들고, 달력이 걸린 벽면으로 향한다. '그는 정좌한 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싸늘한 눈초리로 우드타일을 내려다본다.
주저앉는 일은 없고, 시선을 들어 올린다. 달마다 다른 꽃의 그림이 실린 캘린더. '사람 사는 집처럼 보여야지' 하며 연인이 걸어둔 것이다. 무심코, 7월의 꽃에 곁들여진 문장을 읽는다.
─스노우드롭의 꽃말은 '희망'. 가내에 평안과 만복이 깃드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내리지 못한다는 것도요. 무덤이 있는 그곳 말이죠.」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 밑바닥에 남겨진 것은 희망뿐이었다. 절망은 거시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존재할 필요가 없다. 지하실의 문을 열었을 때 썩어 문드러진 시체가 없어도 괜찮다. 지옥은 현상이므로.
'내가 지금 이 문을 열어도.' 루트 셀러 도어의 문손잡이를 당겨 열어도 그곳에는 고급 와인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운명에 순응하건, 불복종하건 간에. 당신의 시선 아래 절망이 언제나 함께하므로. 알고 있었다. 더욱 일찍 알았어야만 했다.
시즈코는 손을 뻗는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간 다음 불이 켜지는 상영관에 꼼짝없이 앉아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길을 따라 문을 열기 위해. 희망의 그림자 아래에서.
스노우드롭의, 그림자 아래에서. ■
2025-01-15 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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